
책을 쓰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삶이 있다는 사실이다. 충남 태안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해 글쓰기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평범한 주민들의 경험을 공동저서로 발전시키는 출판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백화노인복지관 귀촌 프로그램에 참여한 21명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전문 작가가 아니지만 AI 챗봇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정리하고, 서로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한 권의 책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번 출판 실험의 차별점은 AI가 문장을 대신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참가자가 직접 원고를 작성하는 대신 질문에 답하면서 경험을 구체화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AI는 귀촌 이전의 생활, 복지관과의 첫 만남, 교육 참여 계기, 공동 활동에서 겪은 어려움 등을 순차적으로 질문한다. 짧은 답변에도 당시 장소와 인물, 사건의 전후 관계를 다시 확인하며 막연한 기억을 기록 가능한 이야기로 발전시킨다.
21명의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중심 무대는 지난 9월 3일 열린 백화어울장이다. 참가자들은 이 행사를 준비하며 각자의 경험과 재능을 드러냈다. 식품을 만들거나 생활용품을 판매한 사람, 식물을 소개하고 사진을 촬영한 사람, 접수와 행사장 정리를 담당한 사람까지 역할은 다양했다. 출판 기획은 이러한 활동을 단순한 성과 목록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공동체의 경험으로 바라본다.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완성된 결과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를 남겼다. 습한 날씨 때문에 준비하던 감자칩을 포기하고 마들렌으로 품목을 변경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잼이 원하는 상태로 완성되지 않아 제조 과정을 반복한 참가자도 있었다. 판매가 부진했던 생활용품 부스에서는 안내 문구를 수정한 뒤 체온계가 빠르게 팔리는 변화가 나타났다. 각각의 시행착오는 개인의 판단과 대응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기록된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함께 해낸 순간에는 공동체의 의미가 담겼다. 행사 준비 과정에서 부스 설치를 방해하던 무거운 철제 가구를 여러 참가자가 힘을 합쳐 옮겼다. 남은 허브를 활용해 새로운 물품을 제작하는 협업도 이뤄졌다. 이처럼 작은 노동과 즉흥적인 문제 해결은 참가자들이 단순히 같은 교육을 수강한 관계를 넘어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책의 구성 역시 기존 공동저서와 다른 접근을 취한다. 전반부에서는 개인별 귀촌 배경과 태안에서의 생활을 소개한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복지관에서 시작된 만남부터 공동 학습, 행사 기획, 준비 과정과 장터 운영까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결한다. 독립적인 수기 21편을 나열하는 대신 여러 인물이 같은 사건에 참여하는 논픽션 서사로 독서 경험을 확장하는 구상이다.
백화어울장 당일의 풍경은 이 집단서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른 아침부터 참가자들은 음식과 판매 물품을 준비하고 행사 공간을 꾸몄다. 장터가 시작되자 잼과 생활용품을 찾는 방문객들이 부스를 오갔다. 한편에서는 꽃모종과 삼색버들 관리 방법을 안내했고, 다른 곳에서는 봉숭아 물들이기 체험과 서예 작품 전시가 이어졌다. 카메라에 현장을 담거나 방문객을 응대한 사람들의 활동까지 더해지면서 각자의 역할이 하나의 행사로 완성됐다.
AI를 활용한 편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실에 대한 충실성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인터뷰에서 확인한 사건과 발언을 바탕으로 원고를 구성하고, 실제로 확인되지 않은 대화나 감정을 임의로 만들어 넣지 않는 원칙을 제시했다. AI는 자료 정리와 장면 구성, 중복 내용 검토를 지원하지만 이야기의 출처는 참여자 자신에게 남겨두는 방식이다.
글쓰기 능력에 따른 참여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도 주목할 부분이다. 표현력이 뛰어난 일부 참가자에게 내용이 집중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하나의 주요 사건과 장면을 확보하는 것을 편집 원칙으로 삼았다. 짧게 답하는 사람에게는 세부 상황을 추가로 질문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핵심 장면을 선별하도록 유도한다. 공동저서의 주인공을 특정 인물이 아닌 참여자 전체로 설정한 셈이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교육을 맡은 좋은세상바라기㈜ 최병석 대표는 기술보다 사람의 경험에 무게를 뒀다. 최 대표는 AI가 사람을 대신해 책을 완성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또한 참가자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면서 동시에 공동의 경험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번 출판 기획의 목표라고 밝혔다.
이번 시도는 지역 교육 프로그램의 성과를 보존하는 방식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통상 교육 종료 후 남는 사진과 결과보고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참가자들이 무엇을 경험했고 어떤 관계를 형성했는지 구체적인 생활 기록으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다른 지역에서도 효과적으로 작동할지는 실제 출판 결과와 참여자들의 평가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귀촌은 거주지를 옮기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지역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공동저서가 다루는 핵심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개인들이 함께 배우고 일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다. 하루 동안 열린 장터는 마무리됐지만, 그 과정에서 형성된 경험은 공동의 기록으로 이어지고 있다.
태안 귀촌인 21명의 공동저서 프로젝트는 AI 챗봇 인터뷰를 활용해 글쓰기 경험이 부족한 사람도 출판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한 사례다. 개별 경험을 백화어울장이라는 공통 사건으로 연결하면서 공동체의 형성과 협력 과정을 기록한다는 특징이 있다.
향후 이 방식은 지역 평생교육, 주민 구술 기록, 공동체 아카이빙 등으로 활용 범위를 넓힐 가능성이 있다. 다만 참여자 동의와 개인정보 보호, 인터뷰 내용 검증, 최종 원고 확인 절차가 뒷받침돼야 한다.

태안의 이번 출판 프로젝트는 AI 활용의 가치를 글쓰기 자동화가 아닌 기록 기회의 확대에서 찾고 있다. 21명의 서로 다른 경험이 한 권의 공동저서로 연결되는 과정은 기술이 사람의 목소리를 대체하기보다 그 목소리가 독자에게 전달되도록 지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