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참 속된 말이다. 점잖은 사람이라면 입에 담기 민망할 수도 있다. ‘가오(かお, 顔)’는 일본어에서 온 말이다. 일본어의 본래 뜻은 ‘얼굴’이지만, 우리말의 속어로 들어오면서 의미가 확장되었다. ‘가오’는 우리말 ‘자존심’ 정도로 해석이 되지만 거칠고 통쾌한 맛을 표현할 때 ‘가오’만큼 강한 단어는 없다. 인간의 자존심을 발칙하고 통쾌하게 드러내는 가오는 주머니는 가볍고, 통장은 비어 있고, 남들처럼 좋은 집과 비싼 차를 가질 형편도 못 되지만 그렇다고 사람까지 작아지지 않으려는 마음을 통칭한다.
가오는 허세와 종이 한 장 차이다. 돈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능력도 없으면서 큰소리치고, 남에게 잘 보이려고 무리하게 지갑을 여는 것은 가오가 아니라 허영이다. 남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지키려다 정작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진짜 가오는 남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고개를 숙일 수는 있어도, 영혼까지 무릎 꿇리고 싶지 않은 인간의 존엄이다. 세상이 나를 얼마로 평가하든,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헐값에 넘기지 말아야 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순간, 인간의 품위는 가격표를 달기 시작한다. 가격은 시장에서 매겨지지만, 품위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 수는 있어도 편안한 양심까지 살 수는 없다. 명품으로 몸을 꾸밀 수는 있어도 인격까지 명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높은 자리에 오를 수는 있어도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돈은 없어도 사람 구실은 하겠다는 것이다. 가진 것은 적어도 자존심까지 내놓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오’의 속마음이다.
우리는 자주 돈 앞에서 사람의 크기를 정한다. 비싼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무심하다. 돈 많은 사람의 농담에는 웃어주면서 가난한 사람의 진심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의 무례는 개성으로 포장하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의 당당함은 건방짐으로 몰아붙인다. 물론 자존심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 품위만으로 집세를 낼 수도 없다. 현실은 냉정하고 생계는 절박하다. 때로는 자존심을 접어야 할 때도 있다. 돈은 나의 형편을 말해주지만, 가오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말해준다. 끝까지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진짜 재산이다.
살기 위해 양보하는 것과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 도움을 받는 것과 굴종하는 것도 다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과 자신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도 다르다. 진짜 자존심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늙어서야 삶의 여유를 얻는다. 어떤 사람은 평생 돈을 모으고도 마음이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사람과 세상을 넉넉하게 품는다.
가오란 남에게 보여주는 체면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마음이다. 돈이 없어도 약속을 지키고, 힘이 없어도 비겁한 편에 서지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양심을 쉽게 팔지 않는 것.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가오가 있는 사람이다.
“돈은 없어도 가오는 지켜야 한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